고흐는 누구의 구두를 그린 것일까? 농부 아낙네의 구두? 아니면 자기 자신의 구두? 혹은 아무런 주인 없는 구두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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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라는 독일의 한 철학자는 고흐와 직접 대화를 나누어 본 적도 없고, 그 구두에 대해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자료 조사를 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 구두가 어느 한 농부 아낙네의 구두라고 단정했다. 그리고 이 구두의 밑창에 농부 아낙네가 힘겹게 일을 하며 걸었을 밭고랑의 기운이 묻어 있다고, 그래서 자연의 말 없는 부름이 그림 속에 나타난다고 해석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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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어 샤피로라는 한 미술사학자가 나치의 박해를 피해 독일을 떠난 어느 한 유태인 학자로부터 하이데거의 이 같은 생각이 담긴 한 편의 논문을 건네받았다. 샤피로는 이 논문을 읽고 고흐가 그린 구두의 주인이 농촌 아낙네라고 한 하이데거의 생각을 반박했다. 사실 하이데거는 고흐의 구두 그림을 예로 들면서 그 작품의 구체적인 이름과 제작년도, 그리고 어느 전시회에 출품된 작품인지 등을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고흐가 그린 구두의 그림만도 8점에 이른다. 더욱이 샤피로가 보기에 하이데거가 예로 든 구두그림은 아무리 보아도 고흐가 도시에 체류할 당시에 그려진 것이었다. 이를 근거로 샤피로는 고흐가 그림의 소재로 취했을 구두는 절대로 농촌 아낙네의 구두일 수 없고, 다만 고흐 자신의 구두였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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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 더욱 흥미롭게도 철학자 데리다는 하이데거와 샤피로의 해석 모두를 반박하고 나섰다. 고흐가 그린 그 구두의 주인은 농촌 아낙네의 것도, 고흐 자신의 것도 아니고, 다만 아무도 아닌 자의 것이라고 말이다. 왜냐하면 저 구두의 풀려있는 끈이 이미 그 구두를 신고 있는 자는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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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한 점의 그림을 둘러싸고 제기될 수 있는 진실게임의 내막 속에서 처럼 우리는 과연 어떤 것이 진실이고 거짓인지를 판단할 수 있을까? 객관적인 역사를 좇거나, 어떤 한 사상가의 개인적인 사상의 원칙을 기준으로 하건 간에 우리가 작품을 보면서 놓칠 수 없는 진실은 단 하나다. 그것은 고흐의 구두그림이 존재하고, 그것을 감상하는 자는 현재를 살아가는 바로 지금의 우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시대가 겨냥하는 진실에 근거해 고흐의 구두그림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을 제기할 수 있다. 단 하나의 진실이 없다고 불평하기 보다는, 이렇게 다양하게 제기될 수 있는 그림의 진실들을 너그럽게 수용할 때 아마도 고흐의 구두그림은 미술사 속에서 그리고 우리의 삶 속에서 앞으로도 영원한 생명력을 얻게 될 것만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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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문화재단 전시사업팀 박유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