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겨울처럼 추웠던 어느 가을 날의 기억은
누군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난,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해야 할 때
그 상대방의 과거까지 더듬는다.
퇴계 이황을 보다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도산서원을 둘러보듯이.
이 가을에 나도
누군가에게 나를 온전히 이해 시키고 싶었다.
그래서 내 과거를 까뒤집어 보이기로 하고
정모 가는 길에 내 고향- 예천을 둘러 보았다.
날씨는 겨울처럼 추웠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나 난, 이번 여행을 계획하면서
날씨가 추워지기를 바랬고. 내가 원했던 대로 가을 날씨는
겨울처럼 충분히 추워 주었다.
나의 지난 과거.
벽촌의 작은 마을과 이미 폐교가 된 중고등학교.
열일곱 살 소년의 어느 봄날을 혼미하게 만들었던 교무실 앞, 라일락꽃 나무.
그리고 넓은 모래벌을 지닌 강.
마치 빛바랜 사진처럼
과거의 시간들은 그렇게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쓸쓸한 지난 흔적들을 아무리 자세히 둘러본다 해도
‘나’란 인간의 심연의 바닥까지 보여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난, 그들에게 내 지난 시간의 흔적들을 보여줌으로서
그들 또한 나를 조금더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함께 떠난 그들이 나의 유년과 소년 시절을
자신들의 호흡만큼 가까이 느낄 수 없었다 하더라도
학생은 간데없고 빈 건물만 남아있는 텅 빈 교정에서
난, 그들이 나의 지난 과거까지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했다.
비록 착각일 망정 누군가에게 지난 시간의 흔적을 보여줬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행복할 수 있었다.
물론, 유년과 소년 시절을 함께 보낸 사람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신뢰와 편안함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난, 그들에게서 마치 오랫동안 함께한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쵸코파이 같은 情을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인간관계는
그 관계가 남녀라 하더라도 지속적으로 인간과 인간으로서 만나게 해 준다는 점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사랑은 필요할 때 옆에 없기 쉽지만
제대로 된 우정은 필요할 때 반드시 옆에 있어 준다.
나에게
의미 있고/ 소중했던 시간들/ 그리고 기억.
그들 역시
의미 있고/ 소중했던 시간들로/ 오래 오래 기억하리라 생각한다.
< 겨울처럼 추웠던 마흔 일곱의 어느 가을 날 - 제로 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