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남들에게 어려운 곡이 내겐 더 쉽다” [중앙일보]
“남들에게 어려운 곡이 내겐 더 쉽다” [중앙일보]
피아노의 여제 아르헤리치, 한국 언론과 첫 인터뷰
서울시향과 협연 화제 만발 … “궁극의 테크닉” 찬사
“독주 절대 안한다” 불문율 깨고 무려 세곡 앙코르 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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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그건 아마 내 정신과 의사와 얘기해야 할 것 같다. 나도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하고 싶지 않아졌다.”
7일 저녁 내한 연주를 마친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헤리치(67)는 무대 뒤 대기실에서 기자와 만나 자신이 독주를 중단한 이유에 대해 입을 열었다. 지휘자 정명훈이 이끄는 서울시향과 프로코피예프 협주곡 3번을 휘몰아치듯 연주한 직후였다.
활화산 같은 이 피아니스트는 1980년대 이후 독주 무대에서 사라졌고, 실내악이나 협연 무대에만 서면서 사람들의 호기심을 키웠다. 94년과 지난해 내한했을 때 그는 인터뷰는 물론 어떤 홍보 활동도 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걸었다. 앙코르라도 짧게나마 독주곡을 듣고 싶어하는 청중의 기대는 항상 무너졌다.
이번 내한에서도 아르헤리치는 차가웠다. 연주 이틀 전 한국에 온 그는 “머리가 아프다. 열이 난다”며 약을 찾았다. 기자회견·인터뷰는 물론 없었다. 하지만 특별히 공연을 알리지 않아도 청중은 아르헤리치 공연의 객석을 가득 채운다. 이번 공연의 유료 관객은 92%. 올해 예술의전당 공연 중 최대 유료 관객이었다.
그런데 이 얼음 같은 피아노의 여제가 이날 앙코르를 세 곡 연주했다. 협주곡을 단숨에 해치운 아르헤리치는 스카를라티의 소나타 K.141, 쇼팽의 마주르카 제40번, 슈만의 ‘어린이 정경’ 중 제1곡을 연이어 연주했다. 각각 네 번, 한 번, 한 번의 커튼콜 끝에 청중이 ‘얻어낸’ 독주였다.
지난해 ‘아르헤리치와 친구들’이라는 제목의 실내악 공연에서도 수차례의 커튼콜에도 단 한 곡의 독주 앙코르를 듣지 못했던 한국 청중은 이 ‘기대하지 않은 선물’에 열광했다. 박수가 끊이지 않자 지휘자 아닌 협연자가 오케스트라의 악장을 데리고 들어가 공연이 끝났다는 것을 알리는 진풍경이 벌어졌을 정도였다.
◇“청중 좋아 앙코르 연주”=뜨거운 연주를 마친 아르헤리치는 자신의 대기실에서 정명훈과 서울시향이 연주하는 브루크너 교향곡 6번을 화면으로 모니터하고 있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맨발이었다.
“오늘은 독주곡을 연주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청중의 집중력이 좋았다. 지휘자 정명훈도 꼭 앙코르를 하라고 집요하게 권했다”면서 웃었다.
흡연실로 자리를 옮긴 그는 담배를 계속 피웠다. 이어 “나는 독주를 영원히 그만뒀다고 말한 적은 없다. 지금은 하고 싶지 않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또 “서울에 48시간 전에 도착했지만 24시간 동안은 아프고 24시간은 그저 괜찮았다”며 “긴 독주 프로그램을 할 만큼 건강이 좋지 않다. 연주 직전 졸립고 기분이 쳐지는 증상이 계속된다”는 말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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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한 아르헤리치의 이날 연주는 오차 없이 정확했다. 앙코르로 연주한 스카를라티의 소나타는 같은 음을 한번에 6번씩 두드리는 테크닉이 끊임없이 나와 어려운 곡이지만 아르헤리치는 쉽고 정확하게 연주했다. 공연을 본 피아니스트 김주영씨는 “풍부한 감정을 갖게 된 기계 피아노가 나온다면 저렇게 칠 것”이라는 찬사를 던졌다.
무대 뒤의 아르헤리치는 “남들에게 어려운 곡이 나에게 쉽다”고 설명했다. “반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쉬운 곡이 어렵다”는 것이다. 그는 이어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3번 같은 곡은 단순한 초기 작품이지만 참 어렵다. 하지만 프로코피예프와 쇼스타코비치 같은 작곡가들은 나를 참 좋아하는 것 같다. 얼마 전 피아니스트 미하일 플레트네프를 만났는데 똑같은 말을 하더라”고 덧붙였다.
◇“삶에 정해진 원칙은 없다”=아르헤리치는 콩쿠르 심사 중 자신이 지목한 참가자가 수상하지 못하면 심사위원직에서 물러나고,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연주도 취소하기로 유명하다. 그는 이에 대해 “살면서 한번도 기계적인 원칙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때그때 그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 바로 할 뿐”이라고 설명했다.
“늘 짐을 싸고 풀고 연습하고 무대에 오르는 생활에 지친다”는 속마음도 털어놨다. “연습만 하고 연주는 하지 않는 피아니스트라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생각을 한다”고도 했다.
가족 얘기가 나오면서 아르헤리치의 표정에는 어느새 미소가 번졌다. “나는 시간이 필요하다. 세 딸과 손녀들이 있는데 그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절실하다”는 것이다.
김호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