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곡의 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슈베르트는 샘 솟는 듯한 아름다운 선율에 로맨틱하고도 풍부한 정서를 지닌 이채로 운 작곡가였습니다. 19세기 독일 낭만파 음악의 창시자 중의 한 사람인 그는 국민 학교 교장의 4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11세 때는 비인 궁정 예배당의 소년 합창단 단원으로서 음악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13세에 작곡을 시작하고 15세에는 최초의 서곡을 썼습니다. 16세에 교향곡을 작곡한 이래 계속하여 교향곡 2, 3번, 가곡 “실 잣는 그레트헨”, “마왕 (Erlkonig)”, “들장미”등을 작곡하였는데, 18세 때 까지는 모두 140곡이나 되는 아름다운 가곡을 썼습니다. 슈베르트는 성가대 훈련소 시절부터 음악 이론도 겸해서 배웠는데, 베에토벤에 대하여는 그 당시부터 일생을 통해 흠모하고 존경하였습니다. 슈베르트는 1813년, 16세 때부터 그의 아버지를 도와 보조 교원으로 3년간 일한 외에는 아무런 공직도 없이 작곡에만 전념하였습니다.
그는 동료들과의 공동 생활에서 보히미안적인 일과를 거듭했습니다. 가난한 생활 속에서 31세의 짧은 생애였지만 600곡이 넘는 예술 가곡을 비롯하여 교향곡, 피아노곡, 실내악곡 등 많은 유산을 남겼습니다.
그의 음악은 자연스러우며, 베에토벤과 같이 무겁거나 격하고 장중하지 않습니다. 그 교묘한 멜로디의 구사 방법은 모짜르트에 비할 만하며 조국의 향토색을 반영한 “렌틀러 Landler”에서는 무곡 풍의 밝은 면을 보여 줍니다.
기악곡에 있어서도 성악곡과 같은 맛을 볼 수 있는데, 질서 정연한 형식미보다는 자유로움을 볼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색채적인 화성 기법은 낭만 주의 음악에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슈만, 브라암스, 볼프, 리하르트 시트라우스 등도 슈베르트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5 Bagatelles for Flok Tune for Cello and Piano op.102
1 "Vanitas vanitatum". Mit Humor
2 Langsam
3 Nicht schnell, mit viel Ton zu spielen
4 Nicht zu rasch
5 Stark und markiert
로스트로포비치 (Mstislav Leopol'dovich Rostropovich 1927.3.27~ )
구소련 아제르바이잔 비추 출생. 소년시절부터 아버지에게 첼로를 배우고 1946년 모스크바음악원을 졸업하였습니다. 1945년 전 소비에트연방 음악콩쿠르에서, 1947년 프라하, 1948년 부다페스트의 세계청년우호제(世界靑年友好祭), 1950년 프라하의 국제 첼로콩쿠르에서 각각 1위를 하였습니다. 졸업 후 곧 모교의 교수가 되고, 1968년 모스크바 볼쇼이극장 지휘자 데뷔 명성을 높였습니다. 1974년에 출국한 후는 귀국하지 않았으며, 다음해에 미국망명을 발표했습니다. 1977년 워싱턴내셔널교향악단 음악감독이 되어 활동 했으며 1978년 소련에 대한 비판적 행동으로 소련 시민권을 박탈당하였습니다. 현재 로스트로포비치는 살아있는 첼로계의 전설입니다.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는 실로 굉장한 첼리스트입니다. 그의 테크닉은 유례가 없을만큼 힘차고 격정적이며 완벽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단지 테크니컬한 쪽으로만 흐르지 않고 장대한 스케일과 품격높은 지성미를 부여받았고 따뜻한 감성마저 담아내고 있다는 데에서 그저 놀랍기만 합니다.
파블로 카잘스마저 로스트로포비치의 연주를 가르켜 ‘첼로 연주의 개념을 뒤엎어버린 인물’이라고까지 극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뛰어난 실력과 더불어 실로 방대한 양의 레코딩 기록의 보유자이기도 합니다. 비록 지휘자로서는 최고의 첼리스트다운 역량이 다소 못미치는 감이 있으나 그래도 무리없는 지휘실력을 펼쳐보이고 있습니다. 역사상 가장 뛰어난 명 첼리스트 가운데 하나이기도 한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는 1927년 3월 27일 러시아의 아제르바이잔 공화국 수도 바쿠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레오폴드는 국가에서 ‘공로예술가’라는 칭호를 줄만큼 인정받는 명 첼리스트이자 바쿠 음악원 교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 페도토바 역시 알아주는 피아니스트이자 바쿠 음악원의 교수였습니다. 이처럼 음악적인 명문가에서 자란 덕분에 그는 4살때부터 피아노 작품을 작곡하는 등 천재적인 역량을 보여 주변을 놀라게 했습니다.
로스트로포비치가 어릴때 모스크바 그네신 음악학교로 자리를 옮겨야 했기 때문에 그역시 모스크바로 이주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7살때부터 아버지로부터 첼로의 기초 교육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워낙 선천적으로 음악적인 능력이 있었던 그인지라 첼로를 배운지 얼마 되지도 않은 10살경 생상스의 협주곡을 연주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습니다. 14살 때 그는 모스크바 음악원 작곡가 과정에 등록하고 열심히 공부해, 이듬해 4월 ‘소련 작곡가의 밤’에 출전해 그 재능을 인정받기도 했습니다.
명연 중의 하나로 평가받는 차이코프스키의 ‘로코코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것도 바로 이때였습다. 그는 모스크바 음악원 재학중 프라하 세계 청년 콩쿨에 참가해 우승해 다시한번 그 실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1948년 모스크바 음악원 졸업과 동시에 모교 교수로 발탁되어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이후 그는 유럽의 주요 콩쿨들, 예를들어 부다페스트의 평화 우호제 콩쿨, 1950년 ‘프라하의 봄’ 첼로 콩쿨 등등 여러 곳에 출전해 모두 1위를 하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이런 여러 활동으로 그는 1951년 ‘러시아 인민예술가’라는 칭호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로스트로포비치는 1956년경에는 최초로 러시아를 떠나 영국, 미국, 프랑스 등 구미 30여개국을 돌며 연주회를 펼쳐 세계적인 시선을 모았습니다.
솔로 첼리스트 및 레오니드 코간이나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 등 여러 연주자들과 인상적인 실내악의 세계를 들려주기도 해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결국 그는 이런 맹활약으로 지난 51년의 ‘러시아 인민예술가’라는 호칭 이후 1963년에는 ‘레닌상’을 받았습니다. 로스트로포비치가 지휘자로 등장한 것은 1968년의 일입니다. 차이코프스키의 오페라 ‘에프게니 오네긴’을 지휘한 것이 그것인데, 이것이 호평을 얻어 그는 여기저기에서 객원지휘 의뢰를 받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한창 잘나가던 그였지만 휴머니스트적 자세를 견지하고 있어 1968년 반체제 작가 솔제니친을 자기 별장에 숨겨 두고 보호해 주어 결국 당국으로부터 큰 미움을 받게 됩니다. 결국 그는 외국 여행이 금지되고 갖가지 행동의 제약을 받게 되었습니다. 1974년이 되어서야 국외 여행 제제가 풀릴 수 있었습니다. 결국 그는 보다 자유롭게 음악을 하기 위해 1975년 미국 워싱턴에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곤 2년후 워싱턴 내셔널 교향악단의 음악감독으로 취임해 러시아 당국과 마찰을 빛기도 했습니다. 로스트로포비치는 1980년부터 몇차례에 걸쳐 워싱턴 내셔널 교향악단을 이끌고 내한공연을 갖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