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환상곡 카마린스카야(Fantasy Kamarinskaja)
글링카는 수년간 두 번째 오페라, 푸시킨의 운문 이야기에 의한 <루슬란과 루드밀라>의 작곡에 착수하게 되는데, 이 작품은 작곡을 시작하여 꼭 6년째가 되는 1842년 구력 11월 27일(12월 9일)에 상연되었지만, 기대만큼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이에 실망한 글링카는 1844년 프랑스와 스페인을 여행을 하게된다.
그는 1844년부터 1845년에 걸친 시즌을 파리에서 보내고 베를리오즈와 친교를 맺었으며, 그의 덕택으로 1845년 3월과 4월 세 차례에 걸친 연주회에서 글린카의 작품이 몇 곡 연주되었는데, 프랑스에서 자신의 곡이 연주된 최초의 러시아인이 되었다.
또한 그는 베를리오즈의 관현악법으로부터 많은것을 배운다. 또한 스페인 여행중 민속음악에도 관심을 갖게된다. 그는 바르샤바 체류중인(1848년)에 관현악을 위한 환상곡<카마린스키야>를 작곡한다. 카마란스키야> 이 곡은, 두 개의 러시아 민족 음악으로 되어 있는데, 하나는 혼례의 노래인 (언덕을 넘어서)이며, 나머지는 무곡으로 이루어진 오케스트라를 위한 환상곡이다.
차이코프스키는 그의 일기에 "러시아에서는 많은 러시아적인 교향곡풍의 작품이 만들어졌지만, 이 <카마린스카야>는 바로 이들 많은 도토리 나무 위에 높이 우뚝 솟은 오래된 떡갈나무와 같다" 라고 적었다.
또 차이코프스키는 <카마린스카야>야말로 이후에 태어난 모든 러시아 민족 음악의 접목과도 견줄 만한 것이라고 했으며, 이곡은 러시아 교향악의 바탕을 마련했다고 평하였다.
환상곡 (Fantasia)
형식이나 상상력에 제한을 두지 않는 악곡. 기악 독주자용이 많으며 16, 17세기 영국에서는 특히 현악기·목관악기 합주용으로 된 푸가에 이 용어를 썼고, 16세기초에는 하나 이상의 음악 동기로 구성된 류트 또는 건반악기를 위한 환상곡도 작곡되었다. 건반악기·류트·비올라를 위한 곡은 영국의 경우 다소 늦은 헨리 퍼셀 시절(1659~95)에 판타지 또는 팬시라는 이름으로 융성했다.
독일에서 17세기와 18세기초에 작곡된 오르간 환상곡은 특유의 즉흥적 성격으로 고도의 구조적인 푸가 부분과 직접적으로 대비되었다. 형식과 연주의 자유라는 특성은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1714~88)와 모차르트, 베토벤·슈베르트 등의 곡에까지 계속 나타났다. 이들의 환상곡은 때로 푸가적인 요소를 갖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한편 로베르트 슈만의 환상곡 작품 17(1836)이나 쇼팽의 환상곡 F단조(1840)는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독립된 단일 악장의 전통을 그대로 지켰지만,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판타지 Phantasy for Violin and Piano〉(1949) 등 이후의 작품들은 여러 개의 부분으로 나누어진 르네상스와 바로크 초기 곡의 모습을 반영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반면 프란츠 리스트, 막스 레거, 페루초 부조니 등의 곡들은 J. S. 바흐의 복잡한 대위법적 오르간 환상곡들을 모방하여 만들었다. 한편 존 먼디(1630 죽음) 같은 작곡가들은 표제음악적(묘사적) 가능성을 좇기도 했다. 존 먼디는 날씨를 주제로 하여 환상곡을 작곡했고, 표트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는 교향 환상곡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 Francesca da Rimini〉(1876)를 작곡했다. 환상곡은 초기 역사부터 낭만적 상상력에 많이 의존했지만, 또한 성악곡에 대한 기악 장식의 수단이 되기도 했다(가령 프란츠 슈베르트의 환상곡 〈방랑자 Wanderer〉는 작곡가 자신의 가곡들을 기초로 만든 것임).- 글출처:Daum백과사전-
글링카(Mikhail Ivanovich Glinka,1804. 6. 1~1857. 2. 15)
국제적으로 처음 인정을 받은 러시아의 작곡가로 러시아 국민음악파의 창시자. 10~11세 때 삼촌의 개인 악단 연주를 듣고 음악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1818~22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공부하였고, 존 필드와 찰스 마이어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그는 1824~28년 체신부에서 일하였으나 관리로서는 너무 게을렀고 야심이 없었으며 취미로 노래와 실내악을 작곡하였다. 이탈리아에 3년 동안 있으면서 벨리니와 도니체티에 빠졌지만 결국 향수병에 걸려 '러시아적인' 곡을 쓸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처음 6달 동안 베를린에서 지크프리트 덴에게 열심히 작곡을 배웠고 거기서 〈2개의 러시아 주제에 의한 교향곡 Sinfonia per I'orchestra sopra due motive russe〉(1834)을 쓰기 시작하였다. 아버지가 죽자 러시아로 돌아와 결혼하였고, 오페라 〈황제에게 바친 목숨 Life for the Tsar〉(혁명 뒤 〈이반 수사닌 Ivan Susanin〉으로 제목이 바뀜)을 작곡하는 데 전념하였다.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높여준 이 오페라는 1836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황제 앞에서 공연되었다.
이 시기에 글링카는 가장 뛰어난 노래들을 작곡하였고 1842년에 2번째 오페라 〈루슬란과 류드밀라 Ruslan and Lyudmila〉를 공연하였다. 동양의 환상적 주제와 독창적인 선율의 이 오페라는 리스트에게 새로운 충격을 주었지만 황제와 대중에게는 인기를 얻지 못했다. 이에 불만을 느끼고 결혼생활도 깨지자 1844년 러시아를 떠났다.
1845년 파리에서 2편의 그의 오페라 발췌곡들이 베를리오즈를 비롯한 다른 이들의 지휘로 연주되는 것을 들으면서 만족했는데, 이는 서방에서 가진 러시아 음악의 첫 연주였다. 파리에서 스페인으로 가 1847년 5월까지 2년 동안 머물면서 화려한 카프리초에 의한 〈호타 아라고네사 Jota aragonesa〉(1845)·〈마드리드의 여름밤 추억 Summer Night in Madrid〉(1848)이라는 2곡의 '스페인 서곡'에 쓸 자료들을 모았다. 1852~54년 크림 전쟁이 터져 다시 러시아로 돌아올 때까지, 주로 파리에서 살았다.
그뒤 자신의 음악과 사교생활, 연애에 대한 재미있는 회고록(1887 출판)을 썼는데, 이 책에는 게으르면서도 붙임성있고 신경쇠약 증세가 있는 그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알려진 마지막 작품은 알렉산드르 2세의 대관식 무도회를 위한 〈축전 폴로네즈 Festival Polonaise〉(1855)이다. 글린카는 비범한 재능을 지닌 음악애호가로 알려졌으며 몇 안되는 그의 작품은 모두 귀중한 후기 러시아 음악의 토대로 인정받는다. 〈루슬란과 류드밀라〉는 서정적 멜로디와 다양한 색채의 관현악법을 보여주며, 발라키레프, 보로딘, 림스키 코르사코프가 자신들의 양식을 세우는 토대가 되었다. 차이코프스키는 글린카의 관현악곡 〈카마린스카야 Kamarinskaya〉(1848)가 러시아 교향악의 바탕을 마련했다고 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