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그는 모차르트와 베토벤 이후 피아노와 오케스트라의
유기적인 통합이 배제된 채 독주자의 기교만을
강조하는 과시형 협주곡들이 나타나는 것에 대해 극도의
불쾌감을 피력한 바 있다. 그의 목표는 고전적
이상에 의거한 피아노와 오케스트라의 일체화된 서사시를
작곡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탄생하게 된 것이
바로 단악장의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환상곡이다.
이후 슈만은 이와 같은 단악장 형태의 콘체르트슈튀크
(Konzertst?ck, 보통의 협주곡을 자유로운 형식의
1악장 곡으로 간략히 만든 협주곡) 작품으로, 1849년
드레스덴에서 인트로덕션과 알레그로 아파시오나토
Op.92를 작곡했고, 1853년 뒤셀도르프에서
인트로덕션과 알레그로 콘체르탄테 Op.134를 작곡했다.

1841년은 슈만에게 ‘교향곡의 해’에 해당한다.
교향곡 1번과 후일 교향곡 4번이 된 두 번째 교향곡을 작곡하는
시기에 탄생한 피아노 협주곡은, 당시 슈만의 의도대로
오케스트라의 효과와 구성에 많은 힘을 쏟은 모습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4번 교향곡 또한 원래는 ‘교향적 환상곡’이라는 타이틀로 출판하고자 했었다.
아마도 전통적인 교향곡에서의 소나타 형식보다는
낭만주의자로서 자신의 기질이 보다 자유분방하고 발전적인
양식을 도입한 환상곡 형식에 슈만은 많은 애착을 갖고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 또한 전통적인 협주곡의 형식에서는
많이 벗어나 있는, 오히려 그 변화하는 주제의
모습들은 어딘지 변주곡을 떠올리는 까닭에 ‘환상곡’이라는
제목을 붙이고자 했다는 가정에
높은 개연성을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1841년 5월 13일에서 20일 사이에 쓴 일기에 따르면,
슈만은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환상곡을
독립된 작품으로 출판할 생각이었지만 마땅한 출판사를
찾을 수가 없었다. 이후 4년이라는 시간을 더 투자하여
2악장과 3악장을 작곡하여 1845년 여름에 이르러 정식적인
피아노 협주곡이라는 제목을 붙인 작품으로
완성했고, 그 해 12월 4일 드레스덴에서 페르디난트
힐러의 지휘와 슈만의 아내인 클라라 슈만의 피아노
연주로 초연되었다. 이어 1846년 1월에는 라이프치히에서
멘델스존의 지휘와 클라라의 협연으로
연주되어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슈만은 비르투오소들을 위한 협주곡에 담긴 자기과시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순수음악적인 효과와 구조적인
맥락을 추구하기 위해 피아노와 오케스트라에 동등한
지위를 부여하는 것을 가장 중요시했다. 이를 위해
그는 빈의 고전주의 작곡가들의 작품을 의식적으로
계승하고자 노력했다. 특히 피아니스트와 오케스트라가
대화를 주고받는 형식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이를 뒷받침할 수 있다.
그러나 슈만은 단순히 전통을 답습한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음악언어, 즉 낭만주의적 상상력을
강력하게 발휘하여 새로운 드라마를 만들어냈다.
특히 1악장은 ‘환상곡’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하고자
했던 것을 생각해 본다면, 그는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라는
양자의 대화보다는 통합이라는 관점에서 이를 다루고자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바로 이 점이 동시대에
발표된 비르투오소용 협주곡 혹은 형식 파괴에 앞장선
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 등과 전적으로 구분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