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iacomo Puccini - La Bohème (Tebaldi) (1951) 테발디 주연 (1951년) - 푸치니 라보엠 전막 및 하이라이트
Tebaldi, as Mimi
[Tebaldi, Renata, 1922.2.1~2004.12.19]
이탈리아 마르케주(州) 페자로 출생으로,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노래를
배웠고, 파르마음악학교에서 공부했다. 18세 되던 1940년 페사로에 있는
엔리코 보이토(Enrico Boito)의 음악학교에 입학하여 그의 제자가 되었고,
1944년 로비고에서 보이토의 《메피스토펠레 Mefistofele》에서 엘레나
역으로 데뷔했다. 1945년 스칼라극장에서 조아코모 푸치니(Giacomo
Puccini)의 《라보엠 La Boheme》의 미미 역을 불러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46년 아르투로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에게 미성을 인정받아
스칼라극장의 전후 재개관 기념으로 열린 콘서트에서 주세페 베르디
(Giuseppe Verdi)의 《레퀴엠 Requiem》 독창자로 발탁되었다. 이후
1954년까지 스칼라극장과 계약하고 수많은 곡을 노래했다. 1954년 이후에는
나폴리의 산카를로극장, 런던 코번트가든왕립오페라극장, 샌프란시스코와
시카고의 극장, 메트로폴리탄오페라단 등 일류 극장의 오페라 멤버로 활약했다.
30년 동안 대표적인 이탈리아 리릭 소프라노로 이름을 날렸으며, 가장 극찬을
받은 것은 특유의 유연함과 호소력 있는 감정 표현이었다.
1973년 무대에서 은퇴한 이후 대중 앞에 서지 않고 은둔 생활을 하다가
2004년 12월 19일 이탈리아 산 마리노 자택에서 숙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210love.com에서
테발디가 과연 칼라스에 대해 콤플렉스를 느꼈을까? 흔히 ‘그렇다’고들 한다.
스칼라에서 칼라스와 정면충돌했을 당시 그의 행적을 보면 의심스러운 데가
많다. 당시에는 ‘악마적 카리스마’를 지닌 칼라스에 대해 예쁘장한 ‘천사’의
이미지로 부각되고 있었으나 테발디가 가졌던 위기의식은 평범한 수준을
넘어선 것이었다고 전한다. 그에 따라 한 영화의 대사처럼 ‘보이지 않는 물
밑에서 바쁘게 발을 움직여대는 백조’에 비할 만큼 의심이 가는 행적도 있다.
1950년 칼라스가 처음 스칼라 무대에 서게 된 것은 테발디의 대역으로서였다.
이때 칼라스는 훌륭한 공연에도 불구하고 청중석과 주최측으로부터 고의적이
라고밖에 볼 수 없는 모욕을 당했다. 당시 사건에 대해 무섭게 커가고 있던
칼라스에게 일격을 가하기 위해 테발디가 사전에 준비해 놓고 일부러 자리를
비켜준 것이라는 설이 떠도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듬해 스칼라의 브라질 공연 당시에는 좀 더 노골적인 면을 선보였다.
딱 한 곡만 부르고 앙코르를 절대로 하지 말자고 자기 입으로 제안해놓고는
다른 가수들(물론 칼라스도 포함된다)은 이를 따랐는데, 혼자만 두 곡의
앙코르를 더 부른 것이다.
하지만 테발디와 칼라스의 불화는 ‘한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떠 있는 꼴을
못보는’ 조잡한 군중 심리에 의해 조장된 것이었다고 보는 것이 지금의
일반적인 견해다. 테발디 자신은 지난해 ‘객석’과의 인터뷰에서 “칼라스에
대해서는 ‘이제 그만’ 얘기하고 싶다. 그동안 ‘지나치게 많이’ 얘기되었다”고
소견을 밝혔다. 누가 뭐라 해도 테발디는 20세기가 낳은 이탈리아 태생의
여성 가수 중에 최고의 자리에 놓을 수 있는 인물이다. 카르멘 멜리스를
사사하고 1944년 데뷔 무대를 가졌다. 1946년 토스카니니의 스칼라
연주회에서 대성공을 거두며 세계적인 가수로서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후 20년 동안 리리코 스핀토와 드라마티코의 배역에서 칼라스의 강렬한
음성과 비교되는 맑고 아름다운 음성의 캐릭터들을 만들어냈다.
초기 테발디의 음성은 ‘신이 내린 소리’라 할 만큼 청순함과 청량감이
넘치는 것이었다. 하지만 30대가 넘어서면서부터는 조금씩 중심이 아래로
이동해 균형이 잡혔고 가창의 표현도 차츰 성숙해갔다. 따라서 아이다와
데스데모나 역으로도 훌륭한 음반(데카)을 남기고 있다. 그렇지만 뭐니뭐니
해도 테발디는 푸치니에서 빛을 발한다. ‘라 보엠’ ‘나비부인’ '토스카’
(모두 데카) 등은 한 세대 후의 프레니 외에는 비견할 만한 자를 찾기
쉽지 않다.
출처 : 객석
음악교양 :오페라 무대의 명 콤비/레나타 테발디 & 마리오 델 모나코
아련한 크레타섬으로 안내했던 그 목소리
지난 2월 1일 토요일 밀라노의 스칼라 극장, 이 날 공연은
차이코프스키의 ‘예프게니 오네긴’이었지만 오페라 팬들의 관심은
공연보다는 다른 데 모아지고 있었다. 극장 한켠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어떤 모임을 위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그것은 놀랍게도 거의
잊혀졌던 반세기 전의 소프라노 레나타 테발디의 75세를 기념하는 생일
파티였다(본지 3월호 해외 예술계 리포트 참조). 그곳을 지나던
시민들과 관광객들은 이 소프라노 가수에게 인사하기 위해 밖에까지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을 보며 놀라워했다. “테발디? 그 레나타
테발디가 아직도 살아 있었단 말인가?”
밀라노의 한 아파트에 살고 있는 왕년의 디바 테발디
그렇다. 전세계를 풍미했었던 왕년의 디바는 그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아직도 밀라노 시내의 한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다. 그녀가 마지막
오페라 무대에 섰던 것이 1973년이고, 청중들 앞에서 마지막으로 노래
부른 것이 1976년이니, 테발디는 무려 사반세기를 대중에게 잊혀져
살았던 것이다. 그녀는 아직도 미혼이었다. 단지 그녀의 식구는 평생
동안 그녀를 시중들어 온 충실한 하녀 티나와 푸들 강아지 뉴뿐이다.
테발디가 밀라노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다.
밀라노의 스칼라 극장이야말로 그녀에게 화려한 데뷔와 최고의 영광을
안겨준 곳임에 틀림없지만 사실 스칼라에서 활약한 시기는 얼마되지
않는다. 대략 1946년부터 1958년경까지 10년 남짓할 뿐이다. 그 후
활동 무대를 메트로폴리탄을 중심으로 한 미국으로 옮겼는데, 그것은
다분히 마리아 칼라스 때문이었다. 한 인터뷰에서 그녀는 그 때의 일을
이렇게 회상했다.
“당시 나는 몇 년 동안 스칼라에서 노래를 불러왔으며, 극장에 대한
기여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때 마리아가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그 때
극장의 수뇌부가 공정했었더라면 우리 두 사람 모두 각자 자신들의
노래를 얼마든지 부를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신인인
마리아에게 완전히 정신이 팔려 있었지요. 그들은 그녀에게 매우
치우치는 처사를 내렸습니다. 게다가 모두들 마리아에게 비굴할
정도로 굽신거렸으며, 멋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습니다. 마리아는
극장장·지휘자·연출가·가수들 등 누구라도 지배했습니다. 나는
그것이 견딜 수 없어 미국으로 갔던 것입니다.”
테발디의 말은 옳았다. 그때 스칼라의 모든 사람들은 칼라스란
신성에게 정신이 나간 나머지 테발디에게 소홀했다. 뉴스메이커로서도
칼라스 쪽이 훨씬 투자 가치가 높았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리하여
스칼라는 칼라스란 새로운 외국인 프리마 돈나를 얻는 대신 그들이
키워낸 자국의 가수 테발디를 잃은 것이다. 미국인들은 얼마나
스칼라에 고마워했을까?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으로 전 이탈리아가 파괴되었다. 폭격을 당한
스칼라 극장도 지붕조차 없는 잿더미가 되었다. 오페라를 너무나
사랑하는 이탈리아인들이 전후에 가장 먼저 복구한 것 중의 하나가
오페라하우스였다. 스칼라는 다시 건설되기 시작했으며, 외국으로
망명했던 토스카니니가 스칼라로 돌아오기 위해 밀라노의 중앙역에
내리는 사진이 신문 1면을 장식했다. 드디어 1946년 수많은 밀라노
시민들과 오페라 팬들이 눈물로 박수를 보내는 가운데 스칼라의
‘리오픈 콘서트’가 열렸다.
토스카니니가 등장하자 복도까지 꽉 채운 관객들은 극장이 떠나갈 듯
박수를 쳤으며 아무도 박수를 그칠 줄 몰랐다.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 역사적인 콘서트는 24세의 젊은 소프라노가
처음으로 스칼라 무대에 서는 또 다른 역사의 시작이라는 것을 과연
관객들은 알 수 있었을까?
연주는 대성공이었다. 로시니의 ‘모세’와 베르디의 ‘테
데움’중의 아리아를 부른 테발디의 완벽한 목소리는 스칼라를 메운
관객들을 매료시켰다. 그리하여 무명이었던 그녀는 1946년 스칼라 정규
시즌의 첫 오페라에 일약 주역으로 발탁되었다. 그것은 보이토의
‘메피스토펠레스’였는데, 그녀는 여주인공 엘레나 역을 훌륭히
불렀다. 드디어 테발디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스칼라의 리오픈 콘서트를 통해 화려하게 등장한 ‘천사의 목소리’
무명의 테발디가 어떻게 스칼라의 리오픈 콘서트에 서게 되었을까?
콘서트의 준비를 위해 바쁘게 움직이던 토스카니니는 당시 세계 최고의
가수들을 섭외하고 있었다. 그때 무명의 그녀가 극장의 연락을 받은
것이다 “마에스트로가 당신을 오디션하고 싶어한다.” 그녀는 밤새
한잠도 자지 못한 채 스칼라의 토스카니니 방을 찾았다.
그녀는 반주자의 피아노 반주로 한 곡을 불렀다. 노래가 끝나자
거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잠자코 있었다.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쥐죽은 듯 숨을 죽였다. 이윽고 거장은 한곡 더
불러보라고 했다. 테발디는 ‘오텔로’4막을 부르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거장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더니 그녀에게 물었다.
“‘오텔로’ 4막 전부를? ‘버들의 노래’와 ‘아베 마리아’도?”
그녀는 그 방에서 한 막을 거의 다 불렀다. 테발디의 ‘오텔로’를
들어본 사람이라면 그 방에서의 가슴벅참과 평화로움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테발디의 성공은 승승장구였다. 어려운 환경에서 태어나 한 끼의
식사를 벌기 위해 노래를 불렀던 가난한 소녀는 전후에 새로운 중흥을
꿈꾸는 스칼라극장의 최고의 프리마 돈나가 되었다.
그녀는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타고난 미성으로 사람들을 사로잡은
오페라 사상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를 소유한 몇 사람 중의 한 명이었다.
그녀와 함께 공연한 많은 일류 지휘자들은 한결같이 그녀에게 찬사를
보냈다. 토스카니니는 “나는 여태껏 이렇게 안정된 레카토를 들어본
적이 없소” 라고 말하며, 그녀의 소리를 ‘천사의 목소리’라고
극찬했다. 언론들은 지극히 맑으면서도 비르투오소적인 멋을 지니고
있던 그녀의 목소리를 “우아함과 절묘함을 겸비한 음색”이라고
평가했고, ‘아이다’나 ‘오텔로’ 같은 극적인 역에서는
‘드라마틱한 소리의 기적’이라고 대서특필했다.
테발디 스스로도 이렇게 말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사로잡는 데 힘
같은 건 들지 않았어요. 그냥 무대에서 입만 벌리면 되었어요. 그러면
모두들 감동하였죠.” 그야말로 하늘이 내려준 타고 난 소리였던
것이다.
‘아이다’로 시작해 ‘오텔로’로 만개한 테발디·모나코의
환상의 콤비
테발디가 자신에게 걸맞는 최고의 테너를 만나 최고의 드라마틱
콤비의 위용을 이루기 시작한 것은 1950년부터다. 그해 2월 스칼라의
‘아이다’ 공연에서 전후 제일의 드라마틱 테너인 마리오 델 모나코를
만난 것이다. 안토니오 보토의 지휘로 막이 오른 이 공연은 체자레
시에피·페도라 바르비에리 등 당시 스칼라 최고의 거장들이
동원되었다. 모나코는 이미 2년 전 이 극장에 데뷔해 ‘마농
레스코’와 ‘안드레아 세니에’의 주역으로 그의 놀라운 성대를
과시한 바 있었다. 상상을 초월한 힘과 아름다움이 넘친 이 날의
‘아이다’는 기억할 만한 명연으로 기록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이들의 환상의 콤비는 ‘아이다’뿐 아니라 ‘오텔로’ ‘안드레아
세니에’ 등에 이르는 전후 최대의 드라마틱 오페라의 공연과 녹음
작업으로 이어졌다.
토스카니니를 사로잡았던 데스데모나 역을 그녀가 스칼라에서 부르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1953년 1월 스칼라의
‘오텔로’공연은 관심이 집중되었다. 이미 최고의 드라마티코로
정상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최고의 데스데모나 테발디와 최고의 오텔로
모나코가 비로소 함께 스칼라 무대에 선 것이다. 게다가 이아고 역은
신대륙이 낳은 당시 정상의 바리톤인 레오나드 워렌이었다. “공연의
감동은 필설로 다 말할 수 없었다. 최고의 오텔로와 데스데모나의
결합이었다”라고 당시의 보도는 쓰고 있다. 그 후 테발디·모나코
콤비는 수없이 많은 곳에서 함께 ‘오텔로’를 불렀다.
이들 콤비는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둘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동시대인이며, 모두 이탈리아의 중부 출신이다. 모나코는 피렌체에서
태어나 페사로 음악원을 다녔으며, 테발디는 페사로에서 나서 파르마
음악원을 나왔다. 둘은 천성적으로 너무나 훌륭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모나코는 너무나 남성적이며 우렁찬 소리를, 테발디는 가장
여성적이며 우아한 소리를 자신들의 상표로 하였다. 그들은 모두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역경을 딛고 음악공부를 했으며, 둘 다 힘들게
예술적, 사회적 성공을 성취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쟁 중에
데뷔무대를 가진 것도 둘의 공통점 중 하나이다. 모나코는 41년
‘나비부인’으로, 테발디는 44년 ‘메피스토펠레스’로 데뷔한 것이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자 그들은 화려하게 만개하여 전후 이탈리아
오페라의 최고 스타가 되었으며 동시대에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함께 혜성같이 나타난 모나코는 이탈리아
군인의 신분에서 오페라가수로 다시 돌아왔다. 그는 1946년 전후
최초로 다시 재개된 베로나의 ‘아레나 오페라 페스티벌’에서
‘아이다’의 라다메스 역을 불러 화려하게 등장했다. 그 후
1951년까지 매년 빠짐없이 아레나에 주역으로 섰다. 특히 ‘아이다’는
전적으로 모나코의 차지였다. 후배 프랑코 코렐리에게 이 자리를
넘겨줄 때까지 그는 부동의 라다메스였다. 테발디도 스칼라의 성공
이후 베로나에 초대되어 1947년부터 1950년까지 매년 아레나에서
주역으로 무대에 섰다.
그들은 수없이 많은 곳에서 함께 노래했다. 모나코는 이렇게 회상한
적이 있다. “테발디와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이 노래했습니다.
그녀는 나와 거의 같은 시기에 가수가 되었으며, 공연뿐 아니라 많은
레코딩도 함께 했습니다.” 모나코는 모두 2천회 이상이나 오페라에
출연했으며, 전곡 녹음만 30번 이상을 했다.
모나코의 가장 큰 특징은 역시 독특한 소리에 있다. 그의 소리는
보통의 벨칸토 가수들이 부르듯이 잘 공명되고 울리는 소리가 아니라,
횡격막의 엄청난 힘으로 그냥 밀어서 내는, 듣기에 거의 원시적인
형태의 것이었다. 이런 소리를 처음 들은 사람들은 생소하게 느끼기도
했지만, 대신 대단한 성량에 너무나 곧고 비브라토가 없어 금속처럼
힘차고 강렬하게 들렸다. 그리고 고음에서도 결코 볼륨이 가늘어지는
법이 없었다. 사람들은 그의 소리를 ‘황금의 트럼펫’이라 불렀다.
그의 소리가 가장 잘 어울린 역은 역시 ‘오텔로’였다. 그는 평생
동안 무려 427회의 ‘오텔로’ 공연 기록을 세웠다.
칼라스의 출연과 함께 깨어진 파트너십
그러나 이들 콤비가 오래 지속된 것은 아니었다. 칼라스의 출현으로
미국으로 떠난 테발디는 메트로폴리탄 극장의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그녀는 1955년 메트에서 데스데모나 역으로 화려하게 데뷔했다. 그 후
그녀의 본거지는 더 이상 밀라노가 아니고 뉴욕이었다. 모나코는
유럽에서 더 활약하였으므로 환상적이었던 이들 콤비는 이제 자주 만날
수가 없었다.
테발디는 뉴욕에서 많은 무대에 출연해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그녀는 모나코의 뒤를 이어 나타난 젊은 테너 프랑코 코렐리와
새 콤비를 이루었다. 두 사람은 오페라뿐 아니라 많은 무대와 TV에도
출연했다. 평생을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산 그녀는 사치와
낭비벽으로 세간에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으며, 많은 지휘자들과
염문도 뿌렸다. 코렐리와의 소문도 난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발디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돈을 주고도 그녀가 출연하는 오페라
공연 티켓을 구하기 어려웠다. 미국에서의 그녀의 별명은 ‘미스 솔드
업’(매진)이었다.
그러나 무대 밖에서의 그녀는 쓸쓸했다. 집에서 그녀를 맞아주는
것은 하녀와 강아지뿐이었다. 테발디는 그 빈 자리를 구두와 보석과
골동품으로 채우려 했다. 진정으로 구혼하는 사람은 없었으며,
연애상대들은 대부분 기혼자들이었다. 그리고 구두와 코트가 쌓여감에
따라, 서서히 목소리의 노쇠함도 찾아왔다. 이제 젊은 날의 그
아름다운 소리는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되었다. 1973년 마지막
오페라를 마치고 테발디는 영원히 가극장을 떠난 것이다. 코렐리와
함께 순회공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그녀 스스로가 자신의 변한
목소리를 용납할 수 없었다. 테발디에게 그토록 쉽게 열광했던
관객들은 또한 그녀를 쉽게 잊어버렸다. 테발디가 은퇴하던 해에
전성기의 파트너였던 모나코도 이탈리아에서 마지막 오페라를 공연하고
은퇴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테발디는 젊은 날 추억의 도시 밀라노로 돌아왔다. 다시 무대에 설
수는 없었지만 그녀는 극장과 가까운 곳에 살았다. 미국으로 간 이후
코렐리와 더욱 많은 공연을 했지만 유럽 팬들의 가슴 속에 남아있는
그녀의 파트너는 역시 모나코였다. 가장 싱싱하던 젊은 날의 두
사람―관객들을 아련한 이집트와 크레타 섬으로 데려가던 그들의
목소리…. 지금 남아 있는 그들의 가장 위대한 음반들은 두 사람이
함께 부른 것들이다.
1973년 갑작스런 소리의 쇠퇴로 은퇴한 모나코는 그 후 더 이상
무대에 서지 않았다. 1982년 베네치아 근교 메스트레에서 왕년의
명테너 모나코가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는 보도가 전세계로 전해졌다.
장례식은 수많은 오페라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엄숙하게 거행되었다.
그 중에는 그의 영원한 파트너 테발디도 있었다. 관 속에 누운
모나코의 시신에는 화려한 오텔로의 의상이 입혀져 있었다. 모나코는
죽어서도 위대한 베네치아 공화국의 장군복을 입고 영원한 오텔로로
잠든 것이다.
박종호/음악 칼럼니스트
제 1 막
장소는 초라한 한 아파트의 다락방으로, 때는 크리스마스 이브이다.
이 곳에는 네 사람이 살고 있는데, 그 중 로돌포는 시인이고 마르첼
로는 화가이다. 벽난로에는 아무 것도 지펴지지 않고 있으며 이들은
지금 춥고 배가 고프다. 로돌포는 자기가 쓴 5막으로 구성된 희곡
작품의 원고로 불을 피운다. 그들이 열악한 상황을 견디기 위해 노래
를 부르면서 몸을 녹이려는 순간에 철학자인 콜린느가 무슨 생각에
골몰하면서 들어온다. 그 뒤를 음악가인 쇼나르드가 싱글벙글거리며
술과 음식 그리고 약간의 돈을 마련해 들어온다. 이들 네 사람은 쇼나
르드가 가져온 음식을 나누어 먹으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 때 그들의 집주인인 베노이트가 등장하여 밀린 집세를 내라고 독촉
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에게 술을 권하여 마시게 하고는, 오히려 그의
약점을 들추어내는 아주 희극적인 아리아를 부르면서 그가 집세를
받아가지 못하게 만든다. 그들은 크리스마스 이브를 축하하기 위해서
모무스라는 카페에 가기로 결정한다. 로돌포는 그들을 먼저 보낸 후,
홀로 남아서 작품을 손질한다.
그 때 머뭇거리는듯한 노크 소리가 들린다. 창백한 얼굴의 미미가 초를
들고 들어오면서 촛불을 이방에서 붙여가도 좋으냐고 묻는다. 그녀는
심하게 기침을 하면서 의자에 몸을 내던지듯 앉는다. 그리고 그가 권하는
술을 한 모금 마신 후 나간다. 그러나 잠시 후 그녀는 자기 방문 열쇠를
떨어뜨렸다면서 다시 오는데, 그 때 갑자기 바람이 불어 미미의 촛불과
방안에 켜 있던 촛불마저 꺼진다.
달빛이 휘황한데, 로돌포와 미미는 손을 더듬거리면서 열쇠를 찾기
시작하다가 그만 그의 손이 그녀의 손에 닿는다. 그는 그 유명한
아리아 "그대의 찬손 (Che gelida manina)" 을 부르면서 그녀의
손을 녹여 주려고 한다. 그리고 "나는 시인이라네 (Sono un poeta)"
라는 노래를 이어서 부른다. 그녀도 답례하는 듯 "내 이름은 미미
(Mi chiamano Mimi)" 라는 아리아를 부른다. 그리고 자신이 하는
일은 수를 놓는 것이며, 그녀가 매일 수놓은 꽃이 사람들의 취향에
따라 어떻게 세상에 나가게 된는지에 대해 말한다.
로돌포는 "오, 사랑스런 아가씨 (O soave fanciulla!)" 라는 노래를
부르며 그녀와 팔짱을 끼고 달빛 속을 거닌다. 열정적으로 사랑이
넘쳐 흐르는 2중창이 이어진 후, 두 사람은 모두가 기다리고 있는
모무스 카페로 발걸음을 옮긴다.
제 2 막
모무스 카페 입구에 놓인 탁자가 눈에 띈다. 축제의 분위기가 무르익은
가운데 휴일을 맞이한 사람들의 붐비는 모습을 묘사하는 흥겨운 음악이
울려퍼진다. 장난감을 파는 노점 상인인 파르피놀이 보이고 아이들이
그 주변에서 기웃거리고 있다. 또 다른 소매 상인들, 그리고 여러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로돌포는 자기가 선물한 분홍색의 새 보닛을
쓴 미미를 데리고 그의 친구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간다.
이 무렵 마르첼로의 첫애인이었던 무제타가 나이가 들어보이는
알친도로와 함께 들어온다. 알친도로는 돈 많은 정부 고관으로서
현재 그녀의 애인이다. 무제타는 한참 동안 그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을
보고는 마르첼로에게 공연히 희롱을 건다. 처음에 마르첼로는 관심을
두지 않다가 그녀가 "무제타의 왈츠 (Quando m'envo)"를 부르자,
그도 그녀의 노래를 따라 부른다. 무제타는 알친도로에게 자기의 구두를
수선해 오라고 시켜 그를 내보내고는 그들과 어울린다. 그들은 알친도로가
주문해 놓은 술과 음식을 먹으면서 즐기고는, 구두를 신지 않은 무제타를
들어올리면서 거리를 행진하고 있는 군악대들과 함께 행진하며 간다.
그들이 지불해야 할 많은 금액의 계산서를 알친도로에게 남겨둔 채...
제 3 막
파리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두 달이란 시간이 지난 후, 몸이 허약하여
얼굴이 창백하고 기침을 자주하는 미미가 마르첼로의 집을 찾아 눈이
덮인 거리를 천천히 걸어온다. 미미는 로돌포와의 문제를 마르첼로와
상의하기 위해서다. 자기에 대한 로돌포의 사랑은 지나칠 정도로 질투가
심하고 의심을 많이 품고 있기 때문에 밥먹듯이 싸우는 지옥과 같은
생활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으므로 그와 헤어지지 않을 수 없다는
문제였다.
마르첼로는 그 거리에 있는 한 여관에서 무제타와 함께 살고 있었다.
그 때 로돌포가 여관에서 걸어나오므로, 미미는 얼른 나무 뒤로 숨는다.
그는 마르첼로에게 자기의 고민을 늘어놓다가 격앙하여 "미미는
무정한 여자! (Mimi e una civetta!)"라면서 불평을 퍼붓는다.
그 때 미미가 기침을 참지 못하는 바람에 발각되고 만다. 그녀는
나무 뒤에서 걸어나오면서 슬픔에 젖어 "안녕, 난 무정하지 않아요
(Addio, senza rancore)"라는 이별의 노래를 부르고는 이어서
"기쁨은 어디에 있지 (Donde lieta)"라는 아리아를 부른다.
그들이 막 떠나려 할 즈음에, 마르첼로가 무제타와 격렬하게 싸우고
되돌아온다. 무제타가 다른 남자를 또 다시 유혹하려고 했었다는
것이다. 로돌포와 미미가 "안녕, 달콤한 아침이여 (Addio, dolce
svegliare alla mattina)"라는 아리아를 부르는 동안 다른 두 사람은
심한 욕설을 교환한다. 이제 두 쌍의 연인들이 자신들의 솔직한 심정을
토로하면서 훌륭한 4중창을 부른다. 결국 미미와 로돌포, 마르첼로와
무제타는 서로 헤어지기로 한다.
제 4 막
다시 보헤미안들이 살고 있는 다락방이다. 1막에서와 마찬가지로
마르첼로는 그림을 그리고 로돌포는 글을 쓰고 있다. 그러나 로돌포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그녀에게 사준 분홍색 보닛을 감상에 젖은 채
바라보면서 "아, 미미, 당신은 결코 돌아오지 않는구려 (Ah! Mimi tu
piu non torni)"라고 노래를 부른다. 그를 따라 마르첼로도 무제타를
생각하면서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 콜린느와 쇼나르드는 역시
1막에서와 마찬가지로 음식과 술을 가지고 들어온다. 이들 네 사람은
그들이 겪고 있는 골칫거리를 억지로라도 잊어버리려고 노력한다.
이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리는데, 무제타였다. 그녀는 그들에게
미미가 밖에 있다고 말하고는 지금 그녀는 죽어가고 있다고 알린다.
그녀가 안으로 들어가도 되느냐고 묻자, "물론"이라고 하며 로돌포가
미미를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힌다. 집에는 커피도 포도주도 없었다.
무제타는 마르첼로에게 자기의 귀걸이를 팔아달라면서 넘겨준다.
그리고 콜린느는 "외투의 노래 (Vecchia zimarra)"를 부르며 자기의
외투를 팔러 나간다.
방에는 이제 로돌포와 미미 단 둘만이 남았다. 미미는 행복했던 시절을
즐겁게 회상하면서 "아, 그대는 나를 기억하시나요? (Te lo rammenti?)"
라는 노래를 부드럽게 부르고는 영원한 잠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무제타는 미미가 회복되기를 간구하는 기도를 하고, 로돌포는 빛을
가려주기 위해 창문에 미미의 외투를 걸친다. 쇼나르드가 비로소
미미가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숨을 거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로돌포는 마치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이 침대에
몸을 내던지며 "미미!, 미미!"하고 울부짖는 가운데 막이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