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만 神話_바그너_히틀러로 이어지는 狂氣와 몰락
安仁嬉
1953년 충남 서천 출생. 한국외국어大 독일어과 졸업. 同 문학박사. 한국외국어大·배재大·덕성여대 강사 역임. 번역가. 저서 「게르만 신화, 바그너, 히틀러」, 역서 「발렌슈타인 3부작」,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편지」, 「광기와 우연의 역사」,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히틀러 평전 Ⅰ·Ⅱ」, 「히틀러 최후의 14일」 등.
古代 그리스 悲劇과 연결
<1933년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개최된 나치전당대회 장면. 50만 명이 집결한 이 대회에서 히틀러의 연설이 절정에 달할 때「총통만세!」를 외치는 군중들의 함성이 대회장을 메아리쳤다.> 바그너의 며느리 비니프레트(왼쪽)와 히틀러(가운데), 바그너의 손자 빌란트(오른쪽).
이 때문에 비극은 思辨的(사변적)이고 철학적이다.
그리스의 비극은 神을 예배하는 축제극으로 무대에 올린 「음악극」이었다.
배우 없이 합창단과 합창 지휘자가 노래로 주고받던 무대였다. 그러다가 배우들이 도입되면서 배우들의 연기로 차츰 무게가 옮겨갔다. 널리 알려진 3大 비극 詩人들은 모두 배우를 도입한 작품을 썼다.
바그너의 「음악극」은 초기의 그리스 비극을 연상케 한다.
바그너의 오페라는 전체가 노래로 이루어진 연극이다. 중얼거리듯이 읊조리는 「레치타티보」와 선율이 분명한 「아리아」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다. 바그너에 열광했던 초창기의 젊은 니체는 그리스 비극과의 연관성에 주목했다.
바그너의 작품은 대개 추락과 몰락을 다룬다.
그리스 神話에 비견되는 거대한 게르만 神話가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안에 녹아 있다.
축제극 전야제에 해당하는 「라인의 황금」을 시작으로 「발퀴레」, 「지그프리트」, 「神들의 황혼」 등 모두 합쳐 4부작을 이룬다. 거대한 추락과 몰락의 이야기다. 神들과 半神(=영웅)들과 인간들이 추락하고 하나의 세계가 사라져 간다. 그리스 비극에 견줄 만한 사변적·철학적 의문들을 포함한다.
「거대한 뜻을 품은 작은 남자」
리하르트 바그너
1813년 독일 라이프치히 출생. 라이프치히大 수학. 작품 「방랑하는 네덜란드인」, 「탄호이저」, 「로엔그린」, 「니벨룽의 반지」, 「트리스탄과 이졸데」, 「뉘른베르크의 장인 가수」, 「파르치팔」 등.
19세기에 출현한 바그너 오페라의 규모는 소박했던 그리스 비극과 비교할 수 없는 「블록버스터」급이었다. 바그너가 이 거대한 작품을 만들어서 무대에 올리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는 극작가·작곡가·정치이론가 및 행동가·음악이론가·지휘자·연출자 등의 다중적인 재능을 가졌던 사람이다. 여러 장르들을 기술 좋게 합치고, 음악과 무대예술 분야에서 천재적인 혁신들을 이룩했다.
바그너는 매우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아버지와 의붓아버지가 일찍 죽었다. 그는 평생 돈 걱정에 시달렸다. 훗날 그의 돈 걱정 중 일부는 사치를 좋아하는 그의 버릇이 한 원인이었다.
가난에 恨(한)이 맺혀서인지 유독 호화로운 무대와 저택과 생활환경을 사랑했다. 그의 다채로운 여성 편력은 민망할 정도였다. 돈 많은 유부녀가 그의 「전공분야」였다.
「니벨룽의 반지」(1874년 총보 완성, 1876년 바이로이트에서 첫 공연)는 바그너가 대본을 쓰고 작곡을 하고, 나중에는 거의 손수_건축가와 힘을 합쳐_극장을 짓고, 무대에 올린 작품이다.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은 바로 이 작품의 공연을 위해 그가 갖가지 방법으로 돈을 모아 지은 것이다.
돈 없고 꿈 많은 예술가가 기획한 이런 초대형 프로젝트가 무대 위에 실현되기까지 파란만장하고 극적이지 않을 리 있겠는가?
바그너가 지닌 이 거대한 야망을 실현하는 25년 동안 등장하는 화려한 조역이자, 감추어진 진짜 주역들은 「루트비히 2세」와 코지마이다. 등장과 퇴장을 반복하는 인물은 니체다. 이들은 바그너 때문에 유명해졌고, 바그너를 더욱 유명하게 만들었다.
키가 작은 편이었던 바그너가 가진 거대한 야망을 빗대 독일 사람들은 오늘날 그를 「거대한 뜻을 품은 작은 남자」라고 부른다.
코지마와의 불륜
리스트의 딸이자 바그너의 아내인 코지마.
바그너는 1862년 「니벨룽의 반지」의 텍스트를 먼저 출판했다. 작곡은 상당히 진척되고 있었지만 완성은 아직 먼 때였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가진 치명적인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다. 거대한 무대장치가 필요한 4개의 작품을 공연할 무대와 인력을 동원할 힘이 그에게는 없었다.
출판된 대본의 序文에서 그는 「내 작품을 좋아하는 부자들이 돈을 모아 극장을 지어 달라」는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그의 이런 호소는 1863년 17세의 바이에른 왕국 왕세자이던 루트비히의 가슴에 정통으로 들어가 꽂혔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바그너의 열렬한 팬으로 바그너 작품의 리브레토(대본)들을 달달 외고 있었다. 뒷날 「童畵王(동화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될 왕세자는 자기가 무한히 존경하는 예술가가 내지른 비명을 마음 깊이 간직했다.
바그너가 그런 것을 알 턱이 없었다.
바그너는 1862년 애정이 식은 지 오래인 아내와 결별하고 오스트리아의 빈으로 가서 그곳의 지휘자로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틈틈이 유럽의 유명한 도시들로 연주여행을 계속하면서 수입을 올렸다.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빈에서 큰 성공을 거둘 것이라고 예상한 그는 상당한 빚을 내어 빈에 집을 장만해 사치스럽게 꾸몄다.
1863년 봄, 바그너는 연주를 위해 러시아로 가는 도중 베를린에서 교수로 일하고 있는 옛날 제자이며 지휘자인 「한스 폰 뷜로」를 만나러 갔다. 한스가 너무 바빠서 아내인 코지마 폰 뷜로가 바그너를 접대했다. 코지마는 그의 절친한 친구 리스트의 딸이기도 하다. 그는 코지마가 어릴 때 본 적이 있었다.
당시 그녀는 둘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같은 해 11월에 바그너는 러시아로 가던 중에 다시 코지마를 만났고, 둘째 아이를 출산한 코지마와 바그너는 사랑의 고백을 주고받았다. 코지마는 그보다 24세 아래였다. 바그너는 50세였다. 물론 코지마가 당시 바그너의 유일한 사랑은 아니었다.
아들뻘인 제자의 젊은 아내를 훔쳐내는데는 성공했지만,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흥행은 실패로 끝났다. 빈 극장의 가수들은 곡이 너무 어려워 무대에 올릴 수 없다고 손을 들었다. 바그너는 빚더미에 올라 앉았다.
이듬해인 1864년 바그너는 집이고 예술이고 애인이고 모두 팽개치고 빚쟁이를 피해 줄행랑을 쳤다. 독일 통일로 결말이 나는 세 번의 전쟁 중 맨 처음인 프로이센-덴마크 전쟁이 시작되고 있을 때였다.
유럽 全지역에서 예술가로 명성을 얻었지만 빚쟁이에게 쫓긴 바그너는 스위스의 옛날 친구들에게서도 환영을 받지 못했다. 그가 그곳에서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 준 사람의 아내를 꼬드긴 경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후원자 루트비히 2세와의 만남
바그너의 후원자 루트비히 2세
그는 슈투트가르트의 싸구려 여관방에 숨었다. 비참한 신세였다. 빚쟁이들에게 잡혔다가는 채무자 감옥에 들어갈 판이었다. 위대한 예술가의 꿈이 이렇듯 처절하고 비참하게 끝나 버릴 이 순간에 음악사상 가장 유명한 기적 하나가 일어났다.
그가 도망 중이던 1864년 3월10일 바이에른의 왕이 갑작스럽게 서거하고 같은 날로 18세의 루트비히 왕세자가 「루트비히 2세」로 즉위하였다.
그로부터 며칠 뒤 스위스를 떠나 뮌헨을 거쳐 슈투트가르트로 가던 바그너는 뮌헨 시내 여기저기에 내걸린 새 임금의 초상화를 보았다. 키가 늘씬하게 크고 호리호리한 젊은 왕은 너무 아름다웠다. 자신의 기막힌 처지와 젊은 왕의 모습이 너무나 대조적이어서 그는 비비 꼬인 심정을 자신의 묘비명에 담았다.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가장 누추한 기사단의 기사도 못 된 바그너 여기 잠들다. 난로 뒤에 앉은 개 한 마리 꼬셔내지 못하고 대학의 박사학위도 받은 적이 없다」
루트비히 2세가 왕이 되고 나서 맨 먼저 내린 명령은 「위대한 예술가 바그너를 찾아내 뮌헨으로 모셔오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빚쟁이를 피해 숨어 버린 사람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아서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다. 젊은 왕은 몹시 화를 냈다.
그러다가 마침내 바이에른의 宮內대신이 슈투트가르트의 후줄근한 여관방에서 바그너를 찾아냈다. 1864년 5월4일 18세 젊은 왕과 51세 예술가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루트비히는 바그너의 개인적·예술적 소원을 들어 주겠노라 약속했다. 빚은 즉시 청산되고 화려한 저택이 제공되었다. 곧이어 당시 바이에른 왕국의 최고 건축가인 「셈퍼」가 뮌헨에서 바그너의 작품을 공연할 축제극장 설계를 시작했다. 이때의 설계도면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러나 일이 그렇게 순탄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코지마가 아무런 통보 없이 그해 6월 말에 두 딸을 데리고 바그너의 뮌헨 저택에 등장했다. 그녀는 비서 자격으로 바그너의 집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남편도 젊은 왕도 그들 사이의 관계를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왕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진 바그너는 코지마의 남편 「한스 폰 뷜로」도 궁정극장 지휘자 자격으로 뮌헨으로 불러들였다.
왕과 바그너의 미묘한 관계
젊은 왕은 同性愛(동성애) 성향을 가진 불행한 사람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왕세자였지만 아버지는 너무 엄격하고 어머니는 너무 냉정해서 언제나 보모들과 가까이 지냈다. 그는 아버지뻘인 바그너를 위대한 예술가이며 스승이며 아버지이며 애인처럼 사모하고 존경했던 것 같다.
바그너는 독재자 성향에 정치적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바그너는 정치적인 일에 참견하려 들었다. 그에 반해 스스로를 예술가라고 느끼는 젊은 왕은 바그너의 예술적인 활동에 일일이 간섭하려 들었다.
궁정의 음모가 만만치 않았다. 바이에른은 프로이센을 싫어했다. 한스 폰 뷜로는 프로이센 사람이었다. 바그너와 뷜로에 대한 바이에른 궁정의 미움은 대단했다.
코지마를 놓고 바그너와 뷜로 사이에 벌어진 감정문제는 리스트의 중재로 그런대로 조용히 처리되었다. 코지마는 바그너와 함께 살게 되었다(그들은 나중에 결혼한다). 이런저런 정치적 상황에 밀려서 1865년 12월에 바그너는 바이에른을 완전히 떠나야 했다.
바그너와 코지마의 관계를 모르고 있던 왕은 자기도 왕위를 버리고 스위스로 그들을 따라가겠노라고 고집을 부렸다. 바그너와 코지마로서는 난감한 일이었다. 왕이 돈줄이기도 했지만 자기들의 관계를 더 이상 숨길 수 없었다. 마침내 그들이 왕에게 사실을 털어놓자 젊은 루트비히는 상상도 못 했던 배신감에 엄청난 상처를 입었다.
루트비히 2세는 아버지에 이어 사랑하는 스승이며 영혼의 애인인 바그너를 잃은데다가, 이듬해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 편을 들었다가 함께 패배했다.
이름뿐인 왕의 자리는 건졌지만 이제부터는 그림자 왕으로 살아가야 할 판이었다. 그는 자기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사랑인 「건축」으로 도피했다.
왕은 바그너를 후원한 것 외에 빚더미에 오르면서까지 가능한 모든 돈을 끌어 모아 바이에른 남부에 아름다운 城들을 지어서 남겼다. 오늘날 독일 최고의 관광상품이 된 새 백조의 성(노이슈반슈타인), 「린더호프」, 「헤렌킴제」 등이다.
바이로이트 축제극장
루트비히 2세가 바그너의 후원을 끊지는 않았지만 그들 사이의 관계는 다시 회복되지 않았다.
바그너는 왕이 자신의 작품에 간섭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뮌헨이 아닌 다른 곳에 자신의 극장을 짓고 싶었다. 그는 바이로이트를 선택했다. 이 도시는 아름답고 조용하면서 주변에 관광객을 끌 만한 온천이나 특별한 다른 매력이 없다는 사실이 그의 마음에 들었다. 바그너는 사람들이 오로지 자신의 작품을 보기 위해 이곳에 오기를 원했다.
극장 건축은 상당 부분 루트비히의 후원에 힘입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건축 규모가 커지면서 건축비가 모자라 후원자들의 회비를 받고도 돈을 빌렸다. 바그너 一家는 나중에 여러 해에 걸쳐 축제 수익금으로 빚을 갚아야 했다.
목재로 지어진 극장은 놀라운 음향효과를 보였다. 바그너는 무대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오케스트라를 무대 밑에 배치했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발상이었다.
이 때문에 지휘자들은 엄청난 혼란을 겪었다. 오케스트라 소리가 무대장치에 반사되었다가 객석으로 나는 까닭에, 객석을 향해 있는 가수들의 노래와 오케스트라가 시간적으로 일치하지 않아, 오케스트라가 약간 앞서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수들의 노래가 무대 아래서 잘 들리지 않는 게 심각한 문제였다.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에 온 유명한 지휘자들이 중간에 포기하고 돌아간 사례가 여러 번이었다.
1983년에 「니벨룽의 반지」를 지휘한 게오르크 솔티는 『내 평생 그렇게 혼란스러운 적이 없었다』고 했다. 그는 『음악대학에 다닐 때 장차 내가 무대의 소리가 안 들리고 가수들이 안 보이는 무대 밑 오케스트라 「구덩이」에 서게 될 것이라고 누군가가 말해 주었다면 나는 차라리 의사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했다.
환상적인 음향
하지만 훌륭한 지휘자를 만나면 객석에서 듣는 음향은 환상적이다.
바이로이트의 정신은 어떤 스타 음악가가 두드러지게 튀는 것을 막았다. 초창기 공연 프로그램에는 지휘자의 이름조차 밝히지 않다가 1970년대에는 지휘자에게 좀더 무게를 실어 주었다. 여기서는 어떤 개인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로 통합된 앙상블을 이룬 「음악극」 자체가 주인공이다.
全세계에서 온 수많은 유명 음악가들이 이런 정신을 받아들여 맡은 역할에 따른 사례비만 받고 기꺼이 동참한다. 스타로 부각되지 않아도, 얼마 안 되는 돈을 받아도 바이로이트 극장 무대에 섰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음악가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다.
바이로이트의 축제 방식은 1876년 1회 축제부터 크게 변하지 않았다. 바그너는 하루 종일 일에 지친 사람들이 저녁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자기 오페라에 오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그는 다른 오락거리가 없는 작은 도시를 축제도시로 선택했다.
축제 기간에는 보통 오전 10시30분에 일과가 시작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관객들은 공연 시작(오후 3시나 5시) 한 시간 전에는 와서 극장 근처를 산책하면서 보낸다. 공연 중간의 휴식 시간도 길다.
충분히 휴식을 취한 관객이 넉넉한 시간 간격을 두고 오로지 자신의 오페라에만 푹 잠겼다가 가기를 바그너는 원했던 것이다.
가족처럼 지낸 바그너 一家와 히틀러
바그너가 죽은(1883년) 뒤 바이로이트 축제의 지휘를 맡아 완전히 궤도에 올린 사람은 그의 아내 코지마였다. 그가 살아 있을 때도 이미 그의 작품 활동과 연출을 지켜보고 작업에 동참했던 그녀는 남편의 생각을 최대한 유지하는 것을 원칙으로 축제를 지휘했다.
독일 출신이 아닌 그녀를 못마땅하게 여긴 사람이 많았지만 그녀의 연출은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바그너는 음악보다 연극 쪽에 중점을 두었었는데, 음악 쪽의 비중을 높인 사람이 코지마였다.
그녀가 축제를 맡은 지 8년 만인 1891년에 축제 입장권이 정상 가격의 4~5배에 이르는 암표로 유통됐다.
코지마는 축제를 성공적으로 지휘한 일 말고도 뷜로와의 사이에 태어난 두 딸과 바그너와의 사이에 태어난 세 아이를 모두 잘 키워 냈다.
그녀는 분명한 反유대주의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녀의 신념은 바그너에게 전염됐다. 바그너가 죽은 다음 코지마는 영국 출신의 악명 높은 인종주의자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을 상담 상대로 삼았고, 그를 사위로 맞아들였다.
1906년에 코지마의 뒤를 이어 아들 지그프리트가 바이로이트 축제 지휘를 맡았다. 그는 역량이 뛰어나다기보다 겸손하고 선량한 사람이었다.
그의 아내 비니프레트는 영국 출신으로 그보다 27세나 아래였다. 1923년에 아직 지역 정치가에 지나지 않던 히틀러가 체임벌린을 만나고 바그너 무덤을 참배하러 찾아왔을 때, 비니프레트는 히틀러를 만났고 곧 그를 숭배하게 되었다. 사람을 꿰뚫어보는 듯한 히틀러의 「푸른 눈」은 여성들에게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지그프리트와 비니프레트는 네 자녀를 두었는데, 히틀러는 네 아이들과 비니프레트를 아주 좋아했다. 바그너 一家는 히틀러와 친밀한 가족 같은 관계를 유지했다. 히틀러는 1933년 정권을 잡기 전부터 베를린으로 가는 길에 자주 바이로이트의 바그너 저택(반프리트)에 들러 묵어 가곤 했다.
지그프리트의 맏아들이었던 빌란트는 『어린 시절 바쁜 아버지보다 「볼프 삼촌」(히틀러의 별명)이 아버지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후일 회고했다. 비니프레트는 일찍부터 히틀러와 그의 나치당을 후원했다.
1930년에 지그프리트가 갑작스럽게 죽자 33세의 젊은 비니프레트가 바이로이트 축제 지휘를 맡았다. 시어머니의 뒤를 이어 그녀 또한 처세와 지휘에 능한 여장부였다.
정권을 잡은 히틀러는 어려운 시절 자기를 후원해 준 비니프레트에 대한 고마움을 마지막 순간까지 잊지 않았다.
히틀러는 원래 바그너가 예술작품과 저술로 남긴 게르만주의 및 反유대주의 사상을 보완하여 자기 정치사상의 일부로 삼았다. 바그너 오페라가 보여 주는 다양한 연출 기법에서 정치적 테크닉으로서의 세뇌와 선전술을 배웠다.
나치 시절, 국민 예술가 바그너
화가를 꿈꾸었던 히틀러는 자신이 예술가 기질을 가졌다고 자부했다. 그가 예술가이자 정치적 스승으로 가장 깊은 영향을 받은 인물이 바그너였다. 그런 만큼 나치 시절 바그너는 국민 예술가였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원래 소시민과 군인들을 기반으로 한 나치당 지도부에서 진짜 바그너 팬은 히틀러 한 사람뿐이었다는 사실이다. 괴벨스는 바그너를 단순히 선전수단으로만 여겼다. 뉘른베르크에서 전당대회가 열릴 때면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바그너의 「뉘른베르크의 匠人 가수들」이 공연되곤 하였지만, 많은 사람들이 공연 도중 슬그머니 빠져나가 술집으로 가버렸다고 한다.
히틀러가 공연 중간에 자리를 뜨는 것을 금지하자 공연 중에 상당수가 하품하거나 잠이 들었고 일부는 코까지 골았다고 한다. 결국 히틀러는 모두에게 예술을 강요하는 걸 포기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히틀러의 비호 덕에 바이로이트는 다른 극장에 비해 상대적으로 예술방향의 자율권을 지킬 수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잠깐 바그너와 히틀러가 연관된 독일 역사를 살펴보자.
독일에서는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나폴레옹의 침공을 받고서야 처음으로 뚜렷한 민족주의가 싹 트고 자리를 잡았다.
이 시기 새로운 예술가와 지식인의 활동을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는 말이 「낭만주의 운동」이다. 극단적으로 줄이면 「도이치(오늘날 독일과 오스트리아) 민족의 뿌리 찾기」와 「예술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독일 학자들과 지식인들은 전승되어 내려오는 게르만 神話와 설화를 열렬히 수집하고 책으로 펴냈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그림 형제 동화집」도 이때의 열매이다. 작가들과 예술가들은 게르만 전설과 설화와 神話들을 작품의 내용으로 삼았다.
그들의 후예로 등장한 바그너는 이런 낭만주의 요소를 고스란히 작품에 받아들였다. 그가 「니벨룽의 반지」와 다른 작품의 소재로 삼고 있는 전승들은 낭만파 작가들이 中世 도이치 문학을 발굴하고 수집하여 출판한 내용에서 얻은 것이다.
게다가 낭만파 운동을 태동시킨 역사적 상황은 종결되지 않았다. 나폴레옹의 침공으로 「도이치 민족의 신성로마제국」은 붕괴되었지만(1806년), 그 뒤를 이은 통일국가가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통일 이전 19세기 독일의 지식인과 예술가들의 근본적인 의식은 독일 통일이라는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바그너의 작품에는 곳곳에 통일의 열망과 도이치 민족의 우수성을 강조하는 내용들이 나타난다.
독일 통일의 역사
「니벨룽의 반지」의 첫 공연은 통일된 이후에 이루어졌다. 오랫동안 민족의 숙원이던 통일을 이룩한 독일 사람들은 그동안의 열등감에 맞먹는, 아니 그 이상의 민족적 우월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통일 이후 시대는 대단히 위험한 國粹主義(국수주의)로 흘렀다. 통일의 주역인 프로이센의 「융커(토지 귀족·지주) 계층」은 뼛속까지 스며든 군국주의자들로서, 전통과 기득권의 유지를 철통같이 고집하였다.
통일 이후 들뜬 독일 사회에서 바그너의 작품은 「우수한 도이치 민족」의 전통문화를 상징하는 문화적 축으로 자리를 잡았다. 게르만 神話와 설화 세계를 소재로 삼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통일 이전의 작품에서 그는 뒷날 문제가 될 만한 애국적인 또는 국수주의적인 열망들을 표현했다.
바그너는 反유대주의 저술들을 발표했다. 그는 시대를 앞서간 지식인이 아니라 시대를 고스란히 반영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음악극」이 지나치게 대중의 인기를 얻었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그의 작품이 인기가 있다 보니 그의 정치사상까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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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린스키 극단이 무대에 올린「니벨룽의 반지」 |

어째서 바그너의 작품이 그토록 사람들을 매혹하는 것일까? 이것은 오래 묵은 심리학적·미학적 질문을 포함한다. 「사람들은 왜 신화와 이야기를 좋아하나? 그리고 어째서 그토록 몰락의 이야기에 깊은 감동을 받나?」 하는 질문과 맥이 통하기 때문이다.
비극의 주인공들은 위대한 이상을 품었고 그 이상 때문에 몰락한다. 몰락의 이야기를 책으로만 읽어도 우리는 거기에 빠져들어 깊은 충격을 받는다. 바그너 작품은 무대예술이다. 줄거리와 음악과 가수들의 연기가 합쳐진 음악극은 인간의 감정을 극대화하도록 제작됐다.
몰락의 이야기는 우리를 근원으로 데려간다. 우리 모두의 최종적인 인간 조건, 곧 「죽음」과 「탄생」이 혼합된 근원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 눈앞에서 한 인물이나 그가 대변하는 세계가 몰락하면 우리는 이런 근원적인 상태에 빠진다.
아무도 죽음을 피해갈 수 없음을 우리는 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길이기도 하다. 그리고 또 우리는 이렇게 무너져 버린 한 세계의 폐허가 그대로 우주의 종말이 아니라 새로 생겨날 다음 세계의 시작이며 출발임을 안다.
융커 계층은 독일의 통일을 이룩했지만 역사적 필연에 따라 몰락해야 할 계층이었다. 그들은 잠재의식으로 이것을 느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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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벨룽의 반지」주요인물 家系圖 |
니체가 그토록 열렬히 비판했건만 독일 사람들은 이런 몰락의 정서에 깊이 사로잡혔다. 사회적으로 활기가 넘치는 제국 건설 초기에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19세기 말의 데카당스(퇴폐주의) 情緖(정서)였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바그너가 「니벨룽의 반지」에서 보여 주는 몰락의 이야기는, 그것을 사랑한 이들 융커와 히틀러가 현실에서 몰락하는 과정과 기묘한 일치를 보인다.
융커와 히틀러는 가고 바그너의 예술작품은 남았다.
「니벨룽의 반지」는 北歐 게르만族의 神話인 「에다」에 전해지는 게르만 神들의 이야기와 龍(용)을 죽인 지그프리트 전설을 섞어서 만들었다. 여기서는 「니벨룽의 반지」 공연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주인공들의 혈통과 반지의 흐름을 따라가는 두 가지 관점을 제시하기로 한다.
「니벨룽의 반지」 4부작의 이야기 전개는 이렇다.
[라인의 황금]
● 난쟁이 니벨룽族인 알베리히가 라인의 딸들에게서 라인의 황금을 훔쳐서 반지를 제조, 반지의 힘으로 세계를 지배하려 한다.
● 보탄이 알베리히에게서 반지를 빼앗음. 알베리히가 반지에 저주를 씌운다.
● 보탄이 거인 형제에게 발할을 지은 代價로 반지를 준다. 거인 파프너가 형제 파졸트를 죽이고 반지를 차지한다. 파프너는 변신투구를 이용하여 龍으로 변신하고 동굴 속에 은둔하여 반지와 니벨룽의 보물을 지킨다.
[발퀴레]
● 지그프리트가 탄생하기까지 그 부모의 이야기.
[지그프리트]
● 알베리히의 동생 미메가 키운 지그프리트가 어른이 되어 龍(=파프너)을 죽이고 반지를 차지한다.
[神들의 황혼]
● 지그프리트가 모험을 찾아 떠나면서 아내 브륀힐데에게 반지를 준다.
● 하겐의 「망각의 약」을 마신 지그프리트가 브륀힐데를 잊고 구트루네와 결혼하려고 한다. 그 전에 변신투구를 이용하여 군터로 변신하고 군터를 위해 브륀힐데에게 구혼하러 와서 반지를 도로 빼앗는다.
● 브륀힐데는 군터에게 반지를 뺏겼다고 여겼으나 지그프리트의 손에 반지가 있는 것을 보고 자기가 속은 것을 알아낸다. 분노한 브륀힐데의 복수로 지그프리트가 하겐의 창에 찔려 죽는다.
● 군터가 반지를 차지하려다가 하겐의 손에 죽고, 브륀힐데가 반지를 끼고 지그프리트의 시신을 태우는 장작더미로 뛰어들어 함께 불에 탄다. 라인의 딸들이 반지를 찾아가는 길에 하겐을 강으로 끌고 들어간다.
차세대 마에스트로 발레리 게르기예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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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린스키 극장판「니벨룽의 반지」의 지휘자 발레리 게오르기예프 |
발레리 게르기예프(51)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의 지휘자로서 국제적인 인정을 받는, 대표적인 차세대 마에스트로의 한 사람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白夜」축제의 총지휘자, 뉴욕 메트로폴리탄 수석 객원지휘자, 잘츠부르크 음악축제의 지휘자를 지냈다.
게르기예프와 마린스키 극장이 2003년 바덴 바덴 축제극장에서 무대에 올린 「니벨룽의 반지」 공연은 일반 관객과 평론가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바그너 음악연극의 핵심은 무대와 음악이다. 웅장한 무대와 화려한 조명을 자랑한다. 무대보다 더욱 주목할 것이 가수들의 역량이다. 이 부분에 대한 평론가들의 평가는 대단히 긍정적이다.
2003년 바덴 바덴 무대에 섰던 가수들 중 일부만 서울 무대에서 교체되었다. 2년 전 독일 측 평가를 감안하면, 이번 한국 공연에서 가수들의 기량이 더욱 향상됐으리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오케스트라의 연주, 가수들의 훈련이 어떨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다. 기량 있는 러시아 가수들이 풍성한 소리로 거침없이 바그너의 오페라를 뽑아 올릴 것을 생각하면 흥분과 전율이 온몸을 사로잡는다. 9월을 기다리기가 힘들면서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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