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김호정] 피아니스트 김선욱(22)의 런던 집에는 피아노가 없다. 피아노 제조사인 스타인웨이사(社)가 제공하는 연습실을 쓴다. 고급 악기고, 연습 환경도 좋지만 문제는 경쟁률이다. 같은 연습실을 이용하는 피아니스트들에게 밀리지 않으려면 아침 잠을 포기해야 할 때도 있다. 영국 밖에서의 연주가 많을 때는 미리미리 연습실 예약하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김선욱은 세계적인 아티스트 매니지먼트 ‘아스코나스 홀트’와 계약한 후 지난해부터 런던에서 살고 있다. 그의 집이 있는 곳은 세인트 존스 우드 로드. 조용하고 깨끗한 부촌이다. 다른 동네에 집을 구했다면 더 널찍한 곳에 피아노를 들여놓을 수 있었다. 피아노를 포기한 건 애비 로드 때문이다. 집에서 서북쪽으로 3~4분 걸으면 바로 비틀스의 거리, 애비 로드가 나온다. 김선욱은 이 거리에 이끌려 조금 무리하면서도 이곳을 고집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정명훈의 지휘봉을 구하려 학교를 빼먹었고 서초동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 자신의 자리를 정해놓고 드나들었던, 소문난 괴짜다운 선택이다.
김호정 기자
# 첫 도시
김선욱이 2006년 리즈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했을 때, 그의 수식어는 ‘토종’이었다. 외국 유학 경험이 없이 한국에서만 피아노를 공부하고 세계 톱 대회에서 동양인 최초로 우승했기 때문이다. “유럽이라는 곳에 처음 가본 것도 불과 2004년이에요.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 떠난 여행이었죠.”
첫 유럽 방문지로 고심 끝에 결정한 도시가 런던이다. 런던 중에서도 애비 로드다. “비틀스, 그리고 EMI의 스튜디오 때문이죠. 음악 하는 사람으로서 성지와 같은 곳이었어요. 음악밖에 모르던 제가 딱히 다른 지역을 알 수도 없었고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조용하고 깨끗한 이곳에서 다른 관광객들처럼 표지판에 자신의 사인을 남겼다. “뭐 거창한 말을 남겨놓은 건 아니고요, 제 이름 썼어요. 요새 가보니까 지워지고 흔적도 없어요.” 처음으로 선택한 도시 런던에 세계적 콩쿠르를 제패하고 당당히 다시 돌아갔다. 집에서 나오면 애비 로드를 거쳐 시내로 나간다. 그때마다 김선욱은 예술가 비틀스를 마음으로 만난다.
“비틀스를 처음 들은 건 일반적으로 많이 알려진 음악들을 통해서였을 거예요. 집에도 음반이 하나 있었던 것 같아요. 하도 유명하니까 한번 들어본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는데, 이게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더라고요.” 클래식에 익숙한 귀에도 무리 없이 들리는 화성과, 거기에 가미된 독창성이 김선욱을 마냥 유혹했다. “자극적인 음악은 잘 듣지 않는 편이에요. 그래서 팝 음악은 제 취향이 아니라고 생각했었죠. 하지만 비틀스에는 이전의 팝에서 들을 수 없었던 독특한 화음이 있었어요. 편안했다고 해야 하나.”
김선욱은 피아노로 음악을 시작했지만 바이올린도 진지하게 공부했던 적이 있다. 남들 잘하는 건 그냥 두고 못 보는 성격 때문이다. “사라 장이 기막히게 바이올린 하는 걸 TV에선가 보고 당장 시작했죠.” 첼로도 1년 넘게 배웠다. “이번엔 장한나 때문이었어요.” 다시 피아노로 돌아왔지만, 런던에서는 지휘대를 넘보고 있다. 영국의 영국왕립아카데미에 입학 허가를 받았고, 지난달부터 본격적으로 지휘를 공부하는 중이다. 이처럼 김선욱은 특정 ‘악기’가 아니라 ‘음악’을 하는 연주자라는 꿈을 가지고 있다. 비틀스 또한 음악을 보는 넓은 시야로 건져낸 취향이다.
# 스트로베리 필즈 포에버
“초등학교 다닐 쯤에, 비틀스가 왜 유명한지 보려고 앨범을 사서 들었어요. 화성이 신선하게 진행되고, 음악 주제도 특이하게 풀려나가더라고요.” 이 노래가 ‘스트로베리 필즈 포에버(Strawberry fields forever)’. 김선욱이 가장 좋아하는 비틀스다. 존 레넌이 어린 시절 놀던 공원 ‘스트로베리 필드’에서 나온 이 노래는 청중이 예상하는 화음의 전개를 어기고 흘러간다. “진짜 예술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노래에 자신의 스토리와 계속되는 시도를 담아내잖아요. ‘겟 백(Get Back)’을 듣고도 참 독특한 음악이라고만 생각했는데 특별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죠. 또 여러 가지 버전으로 나온 것도 예술적이고요. 가보지 못한 시대, 1960년대의 특별한 느낌이 노래로 전해져요.”
이렇게 해서 비틀스에 푹 빠진 건 3~4년 전쯤. 존 레넌의 전기를 읽고, 비틀스의 음악을 시대별로 나눠 들으며 궤도를 따라가 보기도 했다. “후기로 가면서 사용된 조성이 다양해졌어요. 마치 클래식 작곡가들처럼 말이죠. 대중음악도 예술적일 수 있다는 걸 처음 알게 해 준 그룹이에요.” 비틀스는 김선욱이 즐겨 듣는 유일한 대중음악으로 남았다. “들으면 편하고, 계속 찾게 되고, 몇 년이 지나 생각나서 들어도 질리지 않는 음악이죠. 가끔은 비틀스의 특정 노래가 갑자기 듣고 싶어질 때가 있어요. 그러면 한 곡만 반복해서 듣는 식으로 갈증을 풀어요.” 무대 위의 긴장감, 연주자 경력에 대한 고민 등을 해소하는 김선욱의 취미인 셈이다.
그는 지난달 서울시향과의 협연 등으로 바빴던 서울 일정을 마치고 런던으로 돌아갔다. 오케스트라 작품의 방대한 원고를 읽고 공부하는 새로운 길을 떠났다. 그리고 비틀스와도 가벼운 이별을 준비 중이다. “내년 2월에 이사하려 해요. 집에 피아노도 들여놓을 수 있고, 새로운 학교에 다니기 더 편한 곳으로 옮기려고요. 당분간은 피아노와 지휘를 병행하느라 정신이 없을 것 같거든요.” 런던에 도착한 김선욱은 “밥 먹을 시간도 없이 바쁜 적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소식을 전해왔다. 비틀스에 이끌려 보금자리 삼았던 애비 로드 인근을 떠나 좀 더 치열한 세상으로 나간다.
“피아노와 지휘에 매진하겠다”는 김선욱의 생각은 이제 베토벤을 기다리고 있다. 2012년 내한해 베토벤의 소나타 전곡(32곡)을 들려준다. 여덟 번에 나눠서 베토벤의 ‘산맥’을 넘는다는 계획이다. 한국에서는 백건우·이경숙·이연화 등 몇 안 되는 피아니스트만이 시도했던 전곡 연주다. “베토벤을 하게 될 때가 제 나이 스물넷인데, 이 나이대의 피아니스트가 생각하는 베토벤 음악의 전체적인 그림을 보여줄 거예요. 비틀스 멤버들이 자신만의 예술을 했듯, 저도 제 색깔을 뚜렷하게 그려가고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한 도전이죠.”
j칵테일 >> ‘비틀스 인터뷰’ 사양하던 김선욱 …
김선욱은 당초 비틀스와 관련한 인터뷰를 한사코 사양했었다. “외도하는 연주자로 보이고 싶지 않다. 피아니스트로 갈 길을 가기도 바쁘다”는 이유였다. 그는 11월 한국 독주회를 앞두고 있다. “내년엔 한국 연주가 없다”고 선언한 만큼, 온통 신경을 쓰고 있는 공연이다. 이번 무대는 ‘영국 진출 이후의 첫 독주회’라는 부제로 연다. 런던은 그에게 꿈의 도시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피아니스트 라두 루푸, 안드라스 쉬프 등을 만날 수 있는 곳이었다. 로열 페스티벌 홀, 바비칸 센터, 위그모어 홀 등 세계적 공연장이 집중된 도시이기도 했다. 음악 재료를 만끽한 김선욱은 이번 독주회에서 클래식 음악의 정통을 보여주는 작품들을 골랐다. 베토벤 소나타 30번과 14번 ‘월광’을 연이어 연주한다. 30번 소나타의 조성인 E장조와 ‘월광’의 c# 단조는 음악적으로 ‘이웃 조성’이다. 이는 김선욱이 프로그램에 숨겨놓은 그림이다. 이어 연주하는 슈만의 ‘아라베스크’와 ‘유모레스크’는 그가 유럽 무대 진출 후 즐겨 연주했던 작품들이다. 한 달에 열 번 이상 무대에 섰을 정도로 강한 트레이닝을 받았던 김선욱이 성장한 모습을 보여줄 공연이다. 11월 27일 오후 8시 서울 예술의전당.
“그는 비틀스 안에서도 가장 형편없는 드럼 주자인걸요”
비틀스의 드러머 링고 스타는 ‘행운의 사나이’로 불린다. 함부르크에서 비틀스와 공연한 인연으로 1962년 피트 베스트를 쫓아내고 드럼을 맡았다. ‘왼손잡이’였던 그는 오른손용 드럼 도구를 썼고, 기교 면에선 완벽하지 않다는 평가를 받았다. 존 레넌은 링고 스타의 실력에 대한 질문을 받고 이런 농담을 했다. “그는 비틀스 안에서도 가장 형편없는 드럼 주자인걸요.” 하지만 그는 독창적이고 스타일리시한 드럼 소리를 선보였다. 그의 드럼으로 곡은 생명력을 내뿜었다. 단순한 운(運)이 아닌 실력이 그를 비틀스의 붙박이로 만든 것이다.
링고는 가족사도 화려하다. 007 시리즈인 ‘나를 사랑한 스파이’의 여주인공 바버라 바흐와 1981년 재혼했다. 전처인 모린 콕스와 낳은 아들 작(Zak)은 2008년까지 영국의 유명 밴드인 ‘오아시스(Oasis)’에서 드럼을 맡았다.
1940년에 영국 리버풀에서 태어난 링고 스타의 본명은 리처드 스타키다. 약골이었던 그는 어릴 때부터 병을 달고 살았다. 성인이 돼서도 음식을 가려 68년 비틀스가 인도 여행을 갔을 때 별도로 음식을 싸갔을 정도였다. 폴 매카트니는 종교적 이유로 채식주의자이지만, 그는 위장 때문에 고기를 못 먹었다. 링고 스타 역시 다른 비틀스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당시 유행한 ‘스키플 음악’에 심취해 57년 친구와 첫 밴드를 결성했다.
그는 비틀스 해산 뒤에도 왕성하게 활동을 했다. 앨범을 내는 것은 물론 TV 다큐멘터리 출연과 쇼 진행을 했고, 어린이물 ‘토머스와 친구들’에 목소리 출연을 했다. 여기서 퀴즈 하나. ‘링고’ 라는 무대 명칭은 어떻게 붙여졌을까. 10대 시절 공연을 할 때 그는 손가락에 반지(rings)를 많이 끼었다. 여기서 ‘링고’라는 애칭이 나왔고, 팬들은 본명인 스타키를 줄여 스타로 불렀다. 그는 결국 비틀스 합류 뒤 드럼으로 ‘반지의 제왕’ 자리에 올랐다.
j BEATLES >> 1966 ‘예수 사건’으로 비난을 사다
4월 콘서트는 이제 안녕. “나는 군중에게 우리를 본뜬 밀랍인형 4개를 보내도 만족할 거라고 본다. 비틀스 콘서트는 음악과 관련 없는 피에 굶주린 의식일 뿐이다”. 광기와 고성으로 점철된 라이브 공연에서 도망치고 싶었던 레넌의 말이었다. 비틀스는 3개월의 휴식기에 들어갔다. 그리고 4월 6일 ‘Revolver’라는 새 앨범을 녹음했다. 훗날 투어기(期)와 스튜디오기(期)의 사이에 놓인 작품으로 평가됐다. 이제 녹음은 비틀스의 최우선 관심사가 됐다.
8월 11일 시카고의 아스토타워 호텔 27층. 레넌은 기자들에게 신문을 당하는 분위기였다. ‘예수 사건’이 발단이었다. 5개월 전 그는 친구이자 작가인 모린 클리브에게 종교 서적을 폭넓게 읽는다고 말했다. 이런 말도 덧붙였다. “기독교는 죽을 것입니다. 줄어들다 소멸할 겁니다. 내가 맞을 겁니다. 지금 비틀스는 예수보다 더 유명합니다”. 이 인터뷰 기사는 5개월 전 영국의 이브닝 스탠더드(사진)에 실렸다. 그러나 6월29일, 미국의 10대 잡지 데이트북은 기사를 다시 인용하면서 제목을 썼다. “나는 로큰롤과 기독교 둘 중에 누가 먼저 죽을지 모르겠습니다.” 난리가 났다. 멤버 중 누군가 총에 맞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레넌은 기자들 앞에서 사과해야 했다. 이제 비틀스의 한마디는 이미 음악인 이상의 것이었다.
8월29일 마지막 공연. 멤버들은 샌프란시스코의 캔들스틱 파크 야구 장 무대에 섰다. 180㎝ 높이의 철책에 갇힌 그들은 ‘Long Tall Sally’를 끝으로 무대에서 내려왔다. 9년의 시간 동안 1400회의 라이브 공연을 남겼다. 비틀스 해체설이 도는 가운데 멤버들은 11월 말 다시 모여 녹음을 하기로 결정했다. 콘서트 없이도 그룹으로 남을 수 있다는 사실을, 멤버들은 깨달았다. 라이브 공연의 상징인 ‘몹 탑스(Mop Tops·더벅머리 스타일 )’ 이미지도 그렇게 벗었다.
1967 든든한 울타리 엡스타인 사망
6월 1일 흑백에서 컬러로. 비틀스의 방향이 확실히 바뀐 새 앨범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가 발표됐다. 음반 재킷부터 가사, 곡까지 비틀스는 흑백에서 컬러의 세계로 발돋움한 듯했다. 활기 넘치던 그들의 창작력은 약물 복용으로 더욱 정점에 이르렀다. 25일엔 BBC방송 주최로 ‘Our World’에 출연해 5개 대륙의 35억 명을 대상으로 ‘All you need is Love’를 연주했다.
8월27일 엡스타인의 사망. 라이브공연을 포기한 비틀스는 엡스타인에게 의존하는 일도 갈수록 줄었다. 멤버들이 영국 웨일스에서 초월명상을 배우는 동안 엡스타인은 런던 자택에서 약물 중독으로 숨졌다. 비틀스의 든든한 후견인이요, 매니저로 울타리 노릇을 했던 그였다. 홀로서기를 시도한 비틀스는 자신들이 출연한 TV영화 제작에 나섰지만 밴드의 사업 수완엔 애초부터 한계가 있었다. 비틀스도 실수를 저지른다는 걸 각인시켜준 계기였다. 개인적 관심사가 다른 멤버들의 차이점도 슬슬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기자 블로그 http://blog.joins.com/center/reporter/
|